언론보도
[매일일보] 기술은 제주로·시장은 전국으로…지역문제 푸는 스타트업
돌·바람·여자가 많아 삼다도(三多島)라 불리는 제주에 네 번째 ‘다(多)’가 더해졌다. 바로 스타트업이다.
지난 18일 제주시 한경면에는 전국에서 모인 창업가들의 목소리가 바람 소리를 대신했다. 이들이 꺼내 든 건 회사 소개가 아니라 제주의 오래된 문제였다. 활용하지 못하는 전기차와 재생에너지, 고령자의 의료 공백, 외국인 체류관리의 빈틈, 산악·해안 지역의 실종 대응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코스포)은 출범 10주년을 맞아 지난 17일부터 3일간 전국의 스타트업을 제주로 불러들였다. 창업가들은 지역 현장을 직접 둘러보고 각자가 보유한 기술과 사업모델로 해결 방안을 찾았다.
이는 코스포가 그리는 ‘다음 10년’의 방향과 맞닿아 있다. 스타트업의 성장을 지원하고 규제를 개선하는 데서 나아가, 지역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발견하고 기술을 투입해 새로운 시장을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제주에서 효과와 사업성을 검증한 서비스는 비슷한 문제를 겪는 다른 지역으로 확산할 수 있다.
의사는 집으로·드론은 현장으로…의료·안전 공백 해법
‘스타트업X제주 혁신 토크’는 이 같은 구상을 구체화하는 자리였다. 식스티헤르츠와 닥터나우, 예스퓨처, 세종엔지니어링 등 스타트업 4개사가 에너지·의료·외국인 정주·안전 분야에서 제주의 다음을 제안했다. 기업의 기술력을 소개하는 일반적인 발표와 달리 제주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먼저 제시하고, 기술을 어디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제주가 선택된 데는 지역적 특성도 작용했다.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여러 지역 현안이 압축돼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의 효과를 확인하기 쉽고, 도민과 관광객의 반응을 바탕으로 사업모델을 보완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의료·안전 분야의 제안은 주민의 일상과 직접 맞닿아 있었다. 닥터나우는 비대면진료와 의약품 배송을 결합해 읍·면 지역 고령자의 의료 접근성을 높이는 방안을 제시했다. 제주에서 닥터나우를 이용한 누적 비대면진료 건수는 약 3만건이다. 전국 누적 이용 건수인 400만건과 비교하면 인구 대비 활용 가능성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정진웅 닥터나우 대표는 “보건소와 의료진을 늘리는 데는 많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며 “의사와 약이 환자의 집으로 찾아가는 구조를 만든다면 의료 접근성을 보다 빠르게 개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종엔지니어링은 제주의 산악·해안 지형에서 발생하는 실종과 재난에 드론과 인공지능(AI)을 활용하는 방안을 내놨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을 드론이 촬영하고, AI가 영상을 분석해 실종자를 찾는 방식이다.
최홍서 세종엔지니어링 대표는 “현장에서 보고가 이뤄지기까지 가장 오래 걸리는 부분은 보고서 작성”이라며 “드론이 현장을 촬영하면 AI가 보고서를 미리 작성해 담당자와 책임자에게 전달하는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안전시스템이 도입되면 제주를 찾는 사람들도 더욱 안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왼쪽부터)최지영 코스포 대표, 위성곤 제주도지사, 김재원 코스포 의장, 박재욱 쏘카·에이펙스모빌리티 대표. 사진=코스포 제공
실증 넘어 시장으로…“지역이 스타트업 첫 고객”
스타트업의 제안이 실제 서비스가 되려면 기술 실증을 넘어 규제 개선과 구매로 이어져야 한다. 발표에 이어 최지영 코스포 대표의 진행으로 위성곤 제주도지사와 김재원 코스포 의장, 박재욱 쏘카·에이펙스모빌리티 대표가 참여한 혁신토크에서도 논의는 ‘실증 이후’에 집중됐다.
김 의장은 “스타트업이 지역에서 원하는 것은 단순한 지원금이나 공간이 아니라 제품과 서비스를 판매할 수 있는 시장”이라고 강조했다. 기술을 시험하고도 규제에 가로막히거나 구매처를 찾지 못하면 실증은 사업화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역이 스타트업의 첫 고객이 돼야 한다는 데도 의견이 모였다. 지자체가 지역문제 해결에 필요한 제품과 서비스를 직접 구매하면 스타트업은 초기 매출과 실적을 확보할 수 있다. 제주에서 성과가 확인된 서비스는 다른 지자체와 민간시장으로 확산할 수 있다.
박 대표는 제주에서 시작해 전국 시장으로 확장한 쏘카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 실증과 사업화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관광객이 제주에서 새로운 기술을 먼저 경험하면 각자의 지역으로 돌아간 뒤에도 서비스에 대한 인식과 수요가 퍼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대담 과정에서는 구체적인 사업 과제도 나왔다. 위 지사가 오후 10시 30분 이후 제주공항에서 택시와 버스를 구하기 어려운 교통 공백을 언급하자 박 대표는 자율주행 기술을 활용한 이동서비스를 제안했다.
제주도는 스타트업 제품의 첫 구매자 역할과 규제특례, 투자로 이를 뒷받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위 지사는 “제주특별법과 규제샌드박스를 활용해 새로운 서비스의 실증을 지원하고, 조성 예정인 1조원 규모 펀드를 통해 제주에서 지역문제를 해결하는 기업에 투자하겠다”고 말했다.
코스포가 제주에서 제시한 다음 10년은 지역과 스타트업의 관계를 지원자와 수혜자에서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사업 파트너로 바꾸는 데 있다. 지역이 문제와 첫 시장을 열고 스타트업이 기술로 해법을 만든 뒤, 제주에서 검증한 사업을 전국으로 확산하는 구조다.
김 의장은 “스타트업이 가장 원하는 것은 지원도 지원이지만 시장”이라며 “제주가 규제를 먼저 풀고 혁신을 통해 시장을 만들어준다면 더 많은 스타트업이 제주로 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